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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을 건넌 공주, 바리공주 이야기

by 인포-한국사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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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은 공주였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바리는 저승길까지 마다하지 않고 영약을 구하러 떠납니다. 한국 전통 신화 속 여성 영웅 서사로 손꼽히는 바리공주 설화는 무속, 문학, 여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승 문턱에 선 소녀

 

버림받은 공주, 저승길을 건너다

바리공주 설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신화 중 하나로, '서사무가'라는 형식으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불행합니다. 어느 왕과 왕비가 오랜 기다림 끝에 여섯 명의 딸을 낳고, 마지막 일곱째 아이마저도 딸이라는 이유로 실망하게 됩니다. 왕은 “이번엔 꼭 아들이어야 한다”라고 간절히 기원했으나 다시 태어난 딸, 곧 바리공주는 그 기대에 어긋났다는 이유만으로 버림받게 됩니다. 이름조차 ‘버리다’에서 따온 '바리'로 지어졌습니다. 어린 그녀는 산속에 버려졌지만, 신령의 도움으로 살아나 자라게 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 왕과 왕비는 중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되고, 여섯 딸은 부모를 살릴 길이 없다고 돌아서지만, 유일하게 버려졌던 그녀만이 부모를 살리기 위해 나섭니다. 바리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저승에 이르러 약수를 얻고, 무사히 부모에게 돌아와 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 극적인 반전은 공주를 단순한 희생자가 아닌 구원의 주체로 부각합니다. 무속에서는 이 설화를 통해 바리가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고, 산 자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존재인 ‘오구데이’ 혹은 ‘바리데기’ 신으로 숭배되기도 합니다. 이 설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도 공주가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출생부터 외면받은 인물이 오히려 가족을 구하고 공동체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녀는 단지 효녀이자 딸의 상징이 아니라, 생사와 구원을 넘나드는 존재로서, 오늘날에도 여성의 주체성과 리더십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속과 문화유산

바리공주 설화는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과 문화유산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무당이 굿을 통해 바리공주의 여정을 재현하는 ‘오구굿’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무속’ 중 하나로, 한국의 샤머니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 자산입니다. 굿에서 무당은 그녀가 저승을 향해 떠나는 과정, 각종 신과의 만남, 약수를 구해 돌아오는 서사를 음악, 춤, 의식과 함께 풀어냅니다. 이는 종합 예술이자 구비문학의 전형입니다. 실제로 이 신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승되며, 그 문화적 다양성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그녀가 죽은 혼령을 인도하는 무속신으로 인식되는 반면, 전라도 지역에서는 자연과 생명의 여신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각 지역 무속문화에 따라 성격과 역할이 조금씩 달라지는 점은 설화의 유연성과 한국 신앙의 포용성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여성 중심의 신화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고대 신화에서 주로 남성 영웅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던 데 반해, 바리공주는 출생의 비극과 존재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신적 존재로 승화되며 그 자체로 신성화됩니다. 오늘날에도 무속과 관련된 굿 의례나 전통 예술에서 바리공주 설화는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창작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무용극, 연극, 소설, 애니메이션 등으로 재탄생하며 대중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가고 있는 점도 이 설화의 지속적인 문화적 가치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과 바리공주

이 설화는 현대 심리학적 시각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됩니다. 특히 ‘버림받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 이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 가족과의 갈등, 소외와 회복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서사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바리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원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부정당한 채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상처를 딛고 부모를 살리기 위한 여정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확립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이라는 구조에도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외부 세계로의 출발, 시련과 시련을 통한 변화, 그리고 귀환을 통한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구조는 그녀가 인간 내면의 성장과 회복 과정을 상징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여성 중심의 자기 구원 서사라는 점은,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주제입니다. 여성의 자립, 자기 결정권, 치유와 성장이라는 메시지는 오늘날 수많은 독자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또한 바리공주는 ‘중간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거부와 수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녀의 여정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복합적 정체성과 유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리공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상처를 어떻게 품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삶 속에서도 계속 살아 움직이는 심리적, 문화적 나침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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